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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겸 가수 김성환 역경을 헤치며 살아온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

mehara 2023. 6. 7. 10:55



김성환은 1950년에 전북 군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께서는 그를 장담아 낳았습니다. 어머니께서는 8남매를 낳으신 후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부터 자식을 너무 많이 낳으시다가 몸이 쇠약해지시더니 결국 미술 분야에서 이겨내지 못하시고 40대 초반에 돌아가셨습니다. 

김성환은 고1 때 어머니를 잃은 후 새어머니를 맞이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떨어졌습니다. 그 때 김성환의 아버지는 모든 자식을 대학에 보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장남을 서울에 있는 재수학원으로 보내게 됩니다. 그곳에서 김성환은 탤런트의 태자로 불릴만큼 뛰어난 재능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는 친구와 함께 동양방송 탤런트 공채 모집에 지원하게 되었고,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2천명이 넘는 지원자 중 최종 12명으로 선발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장남으로서 받은 기대에 적지 않은 압박을 느꼈습니다.

부모님께 대학에 가지 않고 연기자가 되겠다는 말은 할 수 없었습니다. 김성환은 데뷔 후 3년 동안은 부모님을 속이며 연기자로 활동했지만, 이후 부모님께 모든 사실을 밝히면서 결국 아버지를 크게 실망시키게 되었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차라리 시골로 내려와 같이 농사나 짓자고 했지만, 김성환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연기자 생활을 이어간 김성환은 초창기에는 별로 성과를 얻지 못했습니다. 출연료가 적어 가족은 이 생활을 유지하려면 남보다 많이 일해야 했는데, 그는 어떤 반역도 가리지 않고 출연을 했습니다. 

김성환은 잘생긴 외모에도 사투리 억양이 강해서 주인공 역할을 하지 못하고 단역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무명인 상태에서 군대에 입대하게 되었고, 각고의 노력 끝에 사투리를 고치게 됩니다. 그는 군입대 후 전국 팔도에서 올라온 친구들의 말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연기 때 써먹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판단하의 철저한 분석을 통해 사투리를 정리했습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 팔도의 사투리를 모두 정리하여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사투리 박사가 되어 1시간 이상 강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군 시절 지금의 아내와 편지를 교환하며 사랑을 키웠습니다. 그의 아내는 원래 친구의 사촌동생이었는데, 김성환은 제대 후 열애 5년 만에 아내 집안의 결혼 허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부모님은 김성환이 탤런트라면서 텔레비전에는 나오지도 않으니 믿음직스럽지 않다는 생각에 결혼을 강하게 반대하게 됩니다. 게다가 아내의 집안은 배우 이승재의 친척 집안이었는데, 그래서 장인어른이 당시 이순재처럼 들 수 있느냐고 물어봤습니다. 김성환은 순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자기가 키가 작냐, 아니면 인물이 못생겼냐고 대꾸했습니다. 결국, 많은 어려움 끝에 김성환은 처가에 허락을 받아 결국 아내와 결혼하게 되었고, 또한 KBS 약속의 땅에서…

강원 탭에게 광산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에피소드를 다룬 드라마에 출연하여 스타로 올라 10년이나 계속된 지독한 무명생활을 청산하게 됩니다. 군 시절 팔도 사투리를 철저히 분석했던 경험이 극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는 부부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인기를 끌게 되었던 비결이었습니다. 

고생 끝에 이름이 알려지며 그는 이후 다양한 작품에서 시청자들로부터 꾸준히 사랑을 받는 배우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생 끝에 유명 배우가 되어도 수입은 방송국에서 정해진 출연료만 받았기 때문에 탤런트로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의 벌이만 되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때부터 김성환은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탤런트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일에 거침없이 도전하게 됩니다. 김성환은 약속의 땅으로 인기가 있을 때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엠파이어 월드컵 나이트클럽의 사장이 찾아와서 당시 집 한 채가 400만원이었는데 월 200만원을 줄 테니 김성환에게 출연해달라고 요청을 하게 됩니다.

 


김성환은 나름대로 원맨쇼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자신감이 없어 처음에는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이후 약속의 땅이 끝나고 그는 얼마 뒤 빚보증을 잘못 써 집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다시 엠파이어를 찾았지만, 그에게는 그때 잘나갈 때였고, 지금은 안된다는 말이 돌아왔습니다.

 살아야 했던 김성환은 엠파이어 사회자를 꼬드겨 무대 상황극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당시 인기 가수인 최진희씨가 노래를 하고 내려가면서 원맨쇼가 시작되었습니다. 김성환은 "아따 그 아가씨, 겁나게 노래 자러내라고 하면?" 사회자는 "아니 당신 뭐야, 최진희도 모른단 말이야"라고 받아치고 다시 김성환에게 "당신 없다, 반말이야. 내가 전라도에 가수야. 전국노래자랑에 나갔다 백승놈 때문에 장려상 받았지만 대상은 내 거였어. 나도 노래 하나 하면 안 될까?" 하면서 노래와 함께 원맨쇼가 시작되었습니다. 갑작스러운 등장이었지만 좌중은 배꼽을 잡고 웃기 바빴습니다. 김성환은 노래도 가사를 전라도 사투리로 부르면서...

불렀는데 이게 대박이 나면서 그렇게 최선을 다한 결과, 나중에는 반무대의 황제라는 칭호까지 얻으며 반무대에서 현철, 설운도, 태진아, 송대관, 트롯 사인방에 받는 정도로까지 개런티를 받게 되었습니다. 

배우로 방송을 시작했지만 가수로도 히트곡까지 가지며 KBS 가요무대까지 출연하는 것으로 당당히 자리를 잡은 김성환은 뿐만 아니라 라디오에서도 DJ를 맡아서 무려 30년간 라디오 진행도 했고, 거기에 20년간 MBC TV "고양이 좋다" 진행자로도 맹활약했습니다. 뭐를 하나 하면 어떻게 해서든 열심히 거기에 맞는 사람으로 죽기살기로 해온 김성환은 후에 53세의 나 대학까지 진학해서 석사를 거쳐 박사과정까지 밟았는데, 학교 동료들조차도 지각 결석이 없는 김성환의 그런 성실함을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또한 "고양이 좋다"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에 노인들을 만나더니 나중에는 결국 노인 의료 나눔재단의 이사장으로까지 취임하게 되었고, 또한 한국방송연기자협회 이사장까지 맡게 되며 그야말로 전천후 맹활약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성환은 어린 시절, 부모님께서 8남매를 키우면서 고향의 모든 전답을 파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따라서 김성환은 부모님께 효도하는 길이라 생각하여 과거에 팔았던 전답을 되팔았고, 돈이 생길 때마다 사다보니 결국 군산에 3만평에 달하는 토지까지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김성환은 바쁜 스케줄에도 동료들을 챙기며, 힘들었던 송대관이 10억이 필요하다고 하자, 아무것도 묻지 않고 10억을 빌려줬고, 친했던 동료인 김은기와 여운계 등이 세상을 먼저 떠났을 때에도 빈소에 들르며 애도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김성환은 일생을 너무나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아직까지 제주도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드라마 출연하거나 라디오 DJ, 방송 진행, 협회 이사장 등 바쁘게 살아온 그는 자식들도 그런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그의 아들인 김도성은 원래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공부한 재원이었는데, 어느 날 우리나라로 돌아오더니 김성환에게 연기자가 되겠다고 선언합니다.

 



아들의 선언에 깜짝 놀란 김성환은 "방송은 정말 힘들다"며 아들을 말렸지만, 결국 자식에게 알아서 해보라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후 아들은 김성환이 심사를 보게 된 KBS 탤런트 공채 시험에 지원하게 되었지만, 아들의 연기를 본 아버지는 아픈 마음을 부여잡고 아들을 일찍 탈락시켜버리게 됩니다. 실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연기자의 길이기 때문에 연기에서만큼은 아무리 아들이라도 그는 냉정했던 것입니다.

어린 시절 8남매를 낳아주신 어머니를 여의는 슬픔을 겪으며 엄한 아버지 아래에서 연기자가 되었지만, 10년이나 계속된 지독한 무명생활로 결혼 승낙도 억지로 받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나긴 무명 기간 동안 그야말로 피나는 노력 끝에 결국 인기 배우로 우뚝 서며, 제주도도 한번 못 가봤을 정도로 전천으로 바쁘게 살았지만, 사랑하는 아들에게는 인생의 참 가르침을 주기 위해 냉정하게 판단해야만 했던 김성환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사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일에 모든 걸 다 바치며 열정을 불태운 배우 김성환의 인생에 시청자 여러분의 따뜻한 응원을 부탁드립니다.